arrow_back_ios_new 직지 휴먼
백운화상(白雲和尙) : 직지의 저자

1299년에 출생하여 1374년까지 살다간 고려 말의 선승으로 호는 백운(白雲)이고, 이름은 경한이다. 나옹 혜근(懶翁慧懃, 1320~1376),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와 함께 고려 말을 대표하는 삼화상(三和尙)으로 불린다. 백운 경한이 살다간 시기는 공민왕대를 중심으로 한 고려왕조의 끝자락으로, 유학 쪽에서 신유학인 성리학을 수용했을 뿐 아니라 불교계에서도 새로운 선풍(禪風)을 수용하여 사상적 진작을 모색하고 있었다.

선종계 지눌(知訥)의 수선사(修禪社)와 천태종계 백련사(白蓮社)의 신앙결사정신을 계승한 고승들은 원나라에 유학 가서 당시 유행하던 임제선풍의 간화선이나 범승(凡僧) 지공(指空, ?~1363)의 선풍을 수용하였다. 이는 경한도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유학하고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과 지공에게 사사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경한은 사후 행장이나 비문을 남기지 못하여 그의 가계나 사승관계, 일대기 등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197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경한의 선사상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 관련 연구가 다수 진행되었다.

경한은 전라도 고부 출신으로 10세를 전후한 시기에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50대 초반까지 활동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高麗史)』 권54 오행지 8 1346년(충목왕 2) 5월 기사에, 경한이 왕명을 받들어 국가설행 기신제(忌晨祭)를 주관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경한이 당시 불교계 내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370년(공민왕 19)에는 나옹의 천거로 광명사(廣明寺)에서 열린 공부선(功夫選)의 시관(試官)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성불산(成佛山)에 머물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지었다. 만년에는 여주 천녕현(川寧縣) 취암사(鷲巖寺)에 머물다가 77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경한이 입적하자 석찬(釋璨)을 비롯한 그 문도들은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스승이 남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경한이 입적한 취암사에서 문도들에 의해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 목판으로 개판되고, 다음 달에 해주(海州) 신광사(新光寺)에서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상하권(上下卷)이 간행되었다. 일반적으로 선사(禪師)들은 저술을 많이 남기지 않는 편이다. 경한과 관련한 저술도 이 정도에 그치는데,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의 경우 독일의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본보다 앞서는 금속활자본으로 판명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위대한 인물)